잇
다
,
청주의
어제와 오늘을
내일로 잇다
청주
삶은 계란 아니고 삶은 기록입니다
기록의 발견
청주기록원에 들어서면 ‘기록은 삶이다’라는 문장을 볼 수 있다. 기록이 삶이라면, 삶은 곧 기록이 된다.
청주기록원은 시민이 기록문화를 피부로 직접 느껴볼 기회를 만들고자 셀프자서전 만들기 프로그램 <삶은 기록>을 마련했다. 많은 이가 자서전을 쓰고 싶어 하지만 선뜻 쓰기는 어려워한다는 점에서 착안한 것이다. 내 자신의 이야기를 해보는 시간이 흔치는 않으니까.
이 프로그램은 본격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보기에 앞서 기억을 더 끄집어내는 섬세하고 기초적인 작업에 더 가깝다.
여러분도 자신의 이야기를 향한 여행을 떠나보는 걸 추천한다. 과거로의 여행을 떠나고 돌아오면 아마 다른 누군가에게도 좋은 가이드가 되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좋은 여행엔 좋은 가이드가 필요한 법. 그럼 지금부터 우리의 가이드가 되어줄 이지원 참여자의 이야기를 만나보자.
하고 싶은 일을 찾는 사람
스스로를 꿈꾸고, 배우고, 만들고, 키우는 사람이라고 소개하는 이지원 참여자(42, 청주시 남일면)는 청주와 친해지는 중에 <삶은 기록>을 알게 되었다.
“충남에 살고 있다가 남편 직장 때문에 청주로 오게 되면서 퇴사를 했어요. 쉼의 시간이 생기게 되면서 가족과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가만히 생각하니 외부와의 접점이 하나도 없더라고요. 그래서 청주를 알고 싶어 관련 소식들도 많이 받아보고, 행사에 직접 참여도 했었는데 마침 이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어요.”
이지원 참여자는 인생의 기준을 80이라고 했을 때 이미 절반 정도가 지나가는 시점이었던 터라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봐야겠다, 재미있을 것 같다고 생각해서 신청했다며 미소를 지어보였다.
잊을 수 없는 것과 잊고 싶은 것
<삶은 기록>은 무려 60여 가지의 질문을 던진다. 그는 가장 인상적인 것으로 처음 부모가 되었을 때를 기억하냐는 질문을 떠올렸다.
“평소 어린아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서 그런지 저에게 모성애가 클 거란 생각은 안 했어요. 그런데 그 질문에 망설임 없이 글을 써 내려갔어요.”
두세 문장 쓰는 것조차 아주 많은 생각을 해야 했지만 이 질문에만 유독 아주 빠르고 길게 답했다고.
“임신하고서는 첫사랑에 다시 빠진 것처럼 세상이 너무 다 아름다워 보이는 거예요. 배가 불러오면서부터 입덧이 심해 봉지에 귀를 걸고 산부인과를 다녔는데 그런 와중에도 길가에 핀 풀 한 포기가 너무 예뻐보였어요. 우주가 나를 향해 돌아가고 있다고 느낄 정도로요. 근데 그런 행복과 달리 출산 때는 제 골반이 너무 좁아서 나오지 못하는 아이를 뚫어뻥 같은 걸로 잡아 빼야 했을 정도로 다급한 상황이었어요. 분만실에 이미 다른 산모가 있었는데도 그분을 빼고 저를 넣으시더라고요. 이 모든 과정이 예상하지 못했던, 겪어보지 못했던 경험이었어요. 그때의 강렬한 기억을 떠올리게 해줘서 그런지 그 질문이 가장 인상 깊었네요.”
하지만 모든 질문에 행복한 답변만 달리지는 않는다. <삶은 기록>은 과거, 현재, 미래를 묻는 질문으로 나뉜다. 아픈 기록이 잘 남지 않는 것은 어쩌면 떠올리기 힘든 이유가 크다.
“질문을 보면 과거에 대한 비중이 제일 크더라고요. 저는 덮어두고 싶은 기억이 많거든요. 조금만 더 해봤으면 하는 후회들이 있는데 그걸 마주할 때 과연 내가 무너지지 않을 수 있을까 싶었어요.”
아픈 기록이 잘 남지 않는 것은 어쩌면 떠올리기 싫은 이유가 크다. 힘든 것까지 기록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 수도 있지만, <삶은 기록>의 질문은 우리를 그렇게 놔두지 않는다. 과거가 있어야 현재와 미래가 있기 때문이라는 다소 원론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이지원 참여자도 수업 전과 후의 달라진 점은 바로 이 부분이기도 하다.
“저는 굉장히 어둡고 침울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단정 지었는데 막상 생각해보니 밝고 예쁜 기억도 있더라고요. 새로웠어요. 어쩌면 우리가 미처 기억하지 못하는 부분을 기록하려는 시도를 통해 다시금 올바르게 잡을 수 있구나 하는 사실을 말이죠. 저는 프로그램을 이어갈수록 과거를 마주하는 데 있어서 조금 더 단단해질 수 있었습니다.”
인터뷰를 한다고 해 다시 노트를 꺼내본 그는 그때 썼던 버킷리스트 중 몇 가지를 이미 달성했음을 알았다. 기억하지는 못해도 마음속에 어떤 염원이 있으면 어떡해서든 그렇게 하려고 하는구나 알아차릴 수 있었다고.
기록 나누기
<삶은 기록>의 취지는 ‘나’라는 사람에 있다. 나의 이 많은 이야기를 어디에 남겨야 할까, 어떻게 정리해야 할까부터 시작해 첫 단어조차 쓰기 막막한 사람들에게 <삶은 기록>은 조금 더 나은 방향을 알려주기 위한 아주 친절한 도우미이자 안내자가 되어준다.
그는 이미 기록의 긍정 효과를 잘 알고 있었다.
“프로그램에 아이들도 같이 참여하고 싶었는데 못해서 집에서 대신 질문을 아이들과 조금 나눠보기도 했어요.”
그는 <삶은 기록>을 하면서 이런 기록 활동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제가 <삶은 기록>을 가이드 할 기회가 생긴다고 한다면 대체 질문을 만들어보라고 할 것 같아요. 어떤 질문들은 저에게 너무 어렵고, 끄집어내기 싫은 면이 있었다면 반대로 또 누군가에게는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이 분명히 있으리라 생각해요.”
일상의 기록활동
그가 글을 쓸 땐 노트와 블로그를 사용하고, 그림을 그릴 땐 펜과 물감을 사용하는 것처럼 다양한 기록의 방법과 도구들이 있다. 일상 속 기록, 어떻게 남기고 있을까.
“저는 일상에서 실천하고 있는 기록활동이 굉장히 많은 편이에요. 가족끼리 쓰는 일기, 어반 스케치, 포토북, 개인적인 다이어리…. 일기는 어렸을 때부터 꾸준히 썼어요. 다이어리 세대라 다이어리 꾸미기도 열심히 했었고요. 싸이월드가 생기고부터는 제 모든 개인 기록이 웹상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는데 감수성 깊은 문장도 많이 썼죠. 아이가 태어나고부터는 카카오 스토리로 늘 쓰고 기록하고, 가끔 우리 첫째 때 걸음마 언제 했지? 하면 신기하게 기억이 나요. 구체적으로는 기억 못해도 대략 이때쯤이었지 하면 보통 맞더라고요. 기록이 중요한 게 이런 것 같아요. 한 번 쓰고 강렬하게 남았던 기억은 지금 10년이 지났는데도 기억이 나요.
그리고 일기는 본인에 집중을 하는 글쓰기잖아요? 저희 집에는 각자 노트가 있어요. 자기 하루의 일이나 감정을 쓰고 맨 아래쪽에 가족들이 코멘트를 달아줘요. 아빠의 한마디, 엄마의 한마디, 언니의 한마디 이렇게요. 사실 학교 생활이나 회사 생활을 하면 가족과 이야기 나눌 시간이 부족하거든요. 그래서 서로 쓴 일기를 보면 각자 어떤 하루를 보냈는지 알 수 있고, 공감해 줄 수 있게 되는 거죠. 한 줄 코멘트일 뿐이지만 그 기록으로 서로에게 이어져있다는 느낌을 주는 거예요. 최근에는 제가 다시 일을 시작하며 소홀해졌지만 남아있는 기록이 서로에게 힘이 되고 있어요.”
그는 자신의 성향과 취향에 맞춰진 기록을 기반으로 세상과 소통하고 있기도 하다.
“온라인의 기록 플랫폼은 각기 성격이 달라요. 여러 가지를 접하면서 저에게 가장 잘 맞는 플랫폼은 블로그였어요. 하지만 스마트폰으로 남기는 건 다소 불편한 점이 있어요. 인스타그램의 경우, 글을 많이 쓰면 가독성이 떨어지고요. 게시물을 업로드하는 것도 일종의 전략이 필요해요. 제 본 계정은 비공개로 운영하면서 제 마음대로 기록을 남겨요. 팔로워도 친구들 뿐이에요. 대신 따로 운영하는 강아지의 인스타그램 계정은 조금 더 전략적으로 운영하고 있어요.”
변화하는 시대 속 기록 매체 역시 달라지지만 그가 계속 기록을 남기고 있다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을 것 같다.
그림으로 기록하기
다양하게 기록을 하는 그이지만 그림을 그리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했다.
“어렸을 때는 그림으로 상도 받고 했는데 중학교 때부터인가 미술에 기술적인 부분이 커지기 시작하면서는 흥미도 떨어지고 나는 미술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그림을 멀리했어요.
그러다 우연히 여행을 그림으로 기록하는 어느 활동가의 강의를 들었어요. 그분이 다 괜찮으니 그냥 그려보라고 건넨 말이 원동력이 됐어요. 그래서 결국 회사에 연차까지 내면서 그림을 배웠어요. 저에겐 엄청난 도전이었죠. 선을 그리고 수채화 기법도 배우고, 필요한 재료는 그림을 그리는 동료들과 공동구매도 했어요. 무엇보다도 이대로 하면 된다고 자신감을 불어넣어주신 강사님의 말이 큰 힘이 되었어요. 비뚤어진 선을 못 참는 성격이었는데 그 시간을 통해서 힘든 마음이 위로 받고 치유되는 기분이었죠.”
액자에 고이 넣어 집에서 전시하고 있는 그림을 그대로 가져와 준 그는 그림에 담긴 이야기를 풀어내며 그 기록의 도슨트가 되어주었다.
“여기는 홍성의 원도심이에요. 바로 옆에 내포 신도시가 생기면서 홍성 원도심에 사람들이 많이 빠져나간 상태였어요. 어느 도시에서나 이러한 현실을 쉽게 마주할 수 있듯이 제가 들었던 수업도 도시재생과 문화도시 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던 거고요. 청주읍성이 있듯이 홍성에도 읍성이 있는데 나름 복원 작업도 하고 많이 보존이 된 상태로 있어요. 이곳을 쭉 함께 돌면서 예전에 어떤 모습이었는지 이야기를 듣고 사진으로 남기고, 답사하고 오면 함께 그림 그리고요. 이 집 같은 경우에는 색감이 너무 예쁘기도 했고 엄청 오래되기도 해서 선택했어요. 이 그림 속 색상이 실제 그 지붕색과 같아요. 서양식 지붕이라 그 시절에도 이런 집이 있었구나 싶었죠. 그리고 이 뒤에 있는 집은 1980년대에 부유하게 살던 집들의 모양이에요.”
이제는 청주의 모습을 대상으로 그는 그리고 싶은 것이 많다.
기록을 남기고 싶어하는 이들에게
꾸준히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기록은 특히 더 그렇다.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서 출근을 하는 것보다 매일 저녁 한두 줄의 일기를 쓰는 것이 더 어렵다.
다양하게, 묵묵하게 그리고 꾸준히 기록하는 그에게 원동력이 무엇인지 물었다.
“기록은 기억의 한계를 극복하는 좋은 자료에요. 시간은 흐르고 나는 변하니까요.”
기록을 남기고자 하는 이들에게, 기록을 어려워하는 이들에게 들려주면 좋을 이야기였다.
“말의 무게가 저에게는 상대적으로 무거워요. 한번 입에서 떠난 말은 주워담을 수 없기 때문에 상대가 오해하지 않을까 늘 조심스러웠어요. 그래서 과묵한 편이었어요. 저는 오래 생각하고 정리해 글로 표현하는 것이 더 편했어요.”
전화보다 편지가 편했다는 말을 덧붙이는 그에게서 깊이 있는 울림이 느껴졌다. 스마트폰이 보편화되면서 지금은 문장이 아닌 파편화된 단어들로 소통하는 시대가 아닌가.
“기록하고 싶은데 글쓰기가 어렵다면 해시태그 달 듯 키워드나 영화의 한 줄 평 같은 짧은 기록부터 시작하면 어떨까요? 꼭 문장력이 있어야 기록인 것은 아니니까요. 그리고 요즘은 영상기록이 대세이니 글이 아니더라고 기록할 수 있는 방법은 많아요. 저는 다양한 방법으로 기록을 남기고 있지만 가장 편한 방법은 글쓰기에요. 어렸을 때부터 시를 많이 써오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펜으로 그림은 한번 그리면 돌이키기 어렵잖아요. 글은 퇴고가 가능해서 마음이 더 편하달까요?”
그가 덧붙인 말이다.
만나고 싶은 기록
청주기록원에서 기록을 찾을 수 있다면, 그는 어떤 것을 찾고 싶을까?
“지리에 좀 약한 편이에요. 저는 다른 지역에 살다가 청주에 온 경우인데, 만약에 제가 청주에 계속 살았다면 그 변천사를 찾아보고 싶을 것 같아요. 예능 프로그램 중 KBS 2TV <컴백홈>이라는 게 있었어요. 연예인들이 어렸을 때 살던 집을 찾아가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이 자리가 무슨 자리였고, 저기엔 뭐가 있었다면서 동네 이야기를 들려주더라고요. 대체 그걸 어떻게 기억하지 싶었어요. 너무 오래되면 기억이 안 날 수도 있고 왜곡되게 떠올릴 수도 있고요. 동네에 뭐가 있었는지 지역마다 변천사를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 남았으면 좋겠어요. 보통은 그런 기록을 보관하는 곳이 따로 없으니까요.”
새롭게 만들어갈 청주의 기록
그가 청주에서 하는 일은 문화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청주의 원도심에서 사계절을 주제로 다양한 문화행사를 기획하고 만들고 있다. 원도심은 잊힌 도심이 아닌 기억하고 기록해야 하는 곳이라는 것을 담아내고 있다.
”원도심 골목길 축제는 올해 처음 하는 사업이라 시행착오도 많았어요. 오래된 원도심은 역사고, 이 축제는 원도심에 대한 새로운 기록이 될 것이기 때문에 심혈을 기울였어요. 이 곳을 찾는 사람들이 저마다 좋은 기억을 가지고 돌아가 어딘가에 기록을 남긴다면 그것 자체가 얼마나 의미있을까요?
특히 ‘가을: 집 대성’을 준비하면서 <대성동에 가면>이라는 작은 프로젝트를 진행했어요. 기획, 섭외, 인터뷰, 촬영, 기록, 홍보물 제작까지 모두 저 혼자 했는데 동네 주민이나 방문객 모두에게 즐거운 기억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는 사계절을 관통해온 이 원도심 골목길 축제를 틈틈이 사진으로 남겨 두었다. 모든 축제가 끝나면 어반 스케치로 남기고 싶다는 그의 어깨너머로 청주 곳곳의 원도심 골목이 펼쳐지는 듯하다.
삶은 기록
자서전 집필 가이드와 함께 진행한 자신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차분히 기록하는 프로그램.
2023년 2월 한달 간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진행됐을 만큼 큰 인기를 끌었다.
시민기록관을 만든 사람들의 이야기
특집 1
청주기록원 현판 옆에는 ‘시민기록관’이라는 선명한 현판이 하나 더 걸렸다. 어느새 사계절을 함께한 시민기록관.
이런저런 일이 많았던 2022년, 단연 청주시민의 이목을 끈 것은 바로 시민기록관이다. 청주기록원이 개원하고 일 년이 채 지나지 않았을 무렵 청주기록원 1층에 시민기록관이 들어섰다.
이 계획은 2020년부터 논의되었다. 청주시가 문화체육관광부의 문화도시 사업 공모에 선정되면서 기록으로 특화된 문화공간 조성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가장 대표적인 하드웨어 사업으로 이 시민기록관 설립 필요성이 뚜렷해졌다.
청주의 기록문화 정체성을 담아내는 동시에 기록 인프라를 형성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했고, 논의 초반에는 당시 청주시 기록관(현 청주기록원)과 함께 옛 청주시청사, 옥산면 소로분교 등이 후보지로 검토됐다. 다방면의 검토 끝에 청주시 기록관으로 결정되었는데 추후 기록의 통합 관리가 이뤄질 수 있는 가장 적합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방향성 수립, 운영방안 연구 등을 거치고 시민기록수장고 조성부터 시작해 청주기록원 1층에 리모델링이 순차적으로 진행되었다. 그 사이에 청주시 기록관이 청주기록원으로 재개원하며, 그 당위성이 더욱 빛을 발했다. 전국 기초자치단체 중 최초로 영구기록물관리기관인 기록원의 탄생이었기 때문이다.
청주시,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의 숱한 회의 끝에 기록문화 창의도시 청주의 발자취를 비롯해 ‘시민’의 삶을 담아낸 시민기록관이 그 위용을 드러내었다. 이 과정을 치열하게 보내왔고, 또 보내고 있는 유승애·임정민 주무관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시민기록관을 준비하며
시민기록관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한 ‘천(千)의 기록’은 미호강과 무심천으로부터 나왔다. 두 물줄기가 흐르는 모양이 꼭 사람 인(人)자와도 같은데 이를 관통하는 핵심은 ‘기록’이라는 의미를 담으면서도 천 가지의 수많은 삶이 담겨 있다는 의미로도 쓰였다. 넓은 청주를 가로지르는 미호천과 세로로 뻗은 무심천은 시민의 삶과 함께해온 역사로 우리의 기록도 이러한 삶을 기반으로 만들어진다. 시민기록관 콘텐츠를 준비한 유승애 주무관은 “전체적인 콘셉트는 제가 업무를 맡았을 때 어느 정도 다 나와있던 상태였어요. 그 안에 제가 어떤 기록물을 어떻게 넣을 것인지에 더 집중하기만 하면 됐었는데 뭐 하나 만만한 작업이 없었어요.” 라며 그때의 소회를 전했다.
그는 전시를 준비하면서 잘 정리되어 있던 시민기록을 한 번 뒤집어엎었다. 기록원에 들어온 지 5개월 차, 목록만으로 전시할 기록을 선별하는 것은 섬세하고 치밀한 성격의 유승애 주무관과는 맞지 않은 일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검토하고 선별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그의 세심함과 열정 때문이었다.
“덕분에 제가 기록연구사로서의 역량과 책임감을 알아가는 시간이 됐습니다. 보통 공공기록 관리만도 벅차서 민간 영역에는 관심을 갖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기록원에서도 저는 공공기록 업무 위주로 하고 있어서 민간기록을 접할 틈이 없었거든요. 이 기회에 우리 기관에서는 민간기록이 어떻게 관리되어야 하고, 어떤 수집정책을 개선해야 할지에 고민하게 되었어요.”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기록을 보니 청주에 대해 알아야겠다고도 생각하게 됐는데 사라지고 있는 지역을 대상으로 하는 청주기록화 사업을 맡으면서 그 생각은 더 커졌다.
“그래서 청주를 공부하려고 해요. 기록하는 일은 결국 내 지역을 알고 사랑하는 일이더라고요.”
가장 힘들었던 것
그렇다면 힘들었던 일은 없을까? 아무리 디테일한 성격, 일에 대한 열정이 가득해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음이 분명해 보였다.
“시민기록관이 개관하기 전까지의 4개월이 참 기억에 남아요. 제일 힘들었거든요.”
바로 시민기록관을 위해 공사를 시작하던 때다. 기존 시설을 철거해야 했기에 내부 먼지와 소음을 바로 옆에서 겪어야만 했다.
“저뿐만 아니라 모든 직원이 고생했어요. 저희가 자체 공기청정기가 되어서 모든 냄새와 먼지를 정화시킨 셈이에요. 리모델링하는 동안 사무실을 옮길 곳도 마땅치 않아 그냥 여기 있자 했던 건데 도중에 내부 이사만 여러 번 하게 되면서 고생이 많았어요.“
1층에서 2층으로, 2층에서 다시 1층으로 사무실을 옮기면서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힘들었지만 외부에 청주의 기록을 대대적으로 알리려는 과정에 필요한 일이었기에 소홀히 할 수 없었다.
담당자가 좋아하는 기록
시민기록관의 전시공간인 ‘아카이브 人(인)’으로 들어서면 3면을 가득 채운 서랍을 만나게 된다. 유승애 주무관은 “여기 모든 기록물이 시대 상황을 알 수 있는 것들이라 추억을 공유하기에 참 좋아요. 어른 세대는 살아온 시대를 추억할 수 있고, 어린 세대는 그 시대를 알아갈 수 있고, 결국엔 같은 것을 공유할 수 있도록 시민기록관이 도와주는 역할을 합니다.” 라고 말하며, 특히 가정생활을 볼 수 있는 세 번째 쇼케이스를 먼저 소개하고 싶다고 했다.
“공중전화 카드, LP(Long Play Record)의 경우엔 아날로그라는 단어조차 생소해하는 친구들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어요. 공중전화를 잘 쓰지는 않지만 여전히 곳곳에 있고, LP를 틀어주는 카페도 생각보다 많이 있거든요. 그리고 그 옛날에 회갑연 초대장이라니, 일상이 참 근사해지는 순간이죠.”
관람객이 좋아하는 기록
임정민 주무관은 시민기록관 개관 후 전시실 관리와 방문객 응대 등의 업무를 담당하면서 시민과의 접점이 가장 큰 사람이었다. 그를 거쳐간 사람만 2천 명에 다다른다. 관람하는 시민의 얼굴을 가장 많이 봐온 것도 그이다.
“연령대에 따라 관심도는 조금씩 달라요. 성적표나 가계부, 월급봉투는 보는 사람마다 입에서 감탄사가 나오는데 ‘아, 그땐 그랬지 하면서’ 하면서 옛날 이야기가 쏟아져 나와요.”
나잇대가 있는 어른에게는 공감의 기록이 된다.
하지만 청소년들에겐 그 반대로 작용한다.
“어, 이거 영화에서 봤던 거다.”
어떤 학생은 교련복을 보고선 이렇게 말한다. 청소년들은 자신들 세대에 보고 겪은 것이 아니라 미디어를 통해 본 경험을 바탕으로 기억을 한다. 기록을 보고 ‘공감’ 보다는 ‘이해’를 한다. 그리고 아이들은 「기억 한 컷」을 가장 좋아했다. 「기억 한 컷」은 스마트폰으로 찍은 사진을 QR코드(Quick Response Code)를 이용해 전송하면 시민기록관 벽면에 송출해주는 참여형 미디어아트이다.
「기억 한 컷」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이 아이들의 시선을 확 잡아끌었다. 방금 찍은 사진이 벽에 둥둥 떠다니니 신이 나서 목청이 높아진다.
다양한 연령층을 만나다 보니 전 세대가 즐기고 좋아할 만한 콘텐츠는 어때야 할까 하는 고민이 계속된다.
“내년에는 설문지를 준비해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만족도 조사를 하려고 합니다. 직접 응대하려고 노력하지만 놓치는 부분이 있을 수 있어서 좀 더 다양한 경로로 의견을 들어보려고 해요.”
모두의 공간, 아카이브 휴
시민기록관 1층 공간 중 유독 각별한 곳이 있다. ‘아카이브 休(휴)’는 청주기록원을 방문하는 이들에게 안방과도 같은 곳이다. 청주 지역의 기록과 시민의 기록활동을 볼 수 있는 영상이 계속 돌아간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시민기록강좌가 열렸고, 때로는 회의장이 되었으며, 오가며 간행물을 열람할 수도 있다. 종이로 만들어진 포플러 숲길이 탄생하기도 했다. 아카이브 휴는 가장 가변적이면서 역동적이자 상징적인 공간이다.
유승애 주무관은 이곳의 통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 아래 앉아있는 시간을 가장 좋아한다. 뜨끈한 아랫목에 앉아 업무 고민도 하고, 쉬기도 한다. 아카이브 휴가 한적했던 어느 날에는 업무차 ‘봉명주공’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기도 했다. 블라인드만 내리면 영화관의 느낌도 난다.
“어쩌면 이 공간을 제일 열심히 사용하고 있는 사람이 저일지도 모르겠어요. 처음 시민기록관 공간 구상할 때 기록활동을 하는 개인이나 단체의 소모임 공간으로도 사용하게 하면 어떨까 생각해 본 적이 있어요. 물론 지금도 모두에게 열린 공간이지만 이곳을 만들고 운영하는 주체가 청주기록원이 아니라 시민이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죠.”
청주시민뿐 아니라 청주를 찾는 이들도 지역의 이야기를 기록 속에서 찾기 위해 종종 청주기록원을 찾는다. 청주기록원은 모두를 위해 그 문을 활짝 열어두었다.
시민기록관
시민이 기증한 삶의 기록을 한 데 모아둔 기록관으로 청주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공간.
흩어지기 쉬운 개인의 기록을 보관하고 자생적인 기록문화 확장에 일조한다.
100년으로 나아가는 기록, 기록으로 보는 100년
청주고등학교는 1924년 청주고등보통학교(이하 청주고보)라는 이름으로 시작해 어느덧 청주의 역사와 함께 100년을 맞이했다.
백 년이라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청주고등학교를 어떻게 기억하고, 기록하고 있을까.
도시와 기록
청주고등학교,
앞으로 100년을 그리다
청주고등학교 100년을 찾는 일
청주고등학교 57회 졸업생 박익규 씨(57, 청주시 분평동)는 청주고등학교 100년사(史) 편찬위원회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20여 년간 중부매일에서 기자 생활을 하다가 충북도지사 연설관, 충북인재양성재단 사무국장을 거쳐 지금은 농업인이자 청주고등학교 100년사 편찬위원회 간사로 지내고 있다.
총동문회 운영위원회에 참석했다가 100년사 이야기를 듣고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마침 시간도 났고, 그간 하던 일도 글쓰는 일이기에 제가 하겠다고 했습니다. 의미 있는 일인데 그 무게감 때문인지 한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더군요. 그런데 하다보니 힘도 들고 짜증도 불쑥 나곤 합니다.(웃음)”
100년이라는 단어가 주는 부담감도 있지만 기라성같은 선배들을 두고 청주고등학교를 대표한다는 생각에 책임감이 매우 컸다고 한다.
“요즘은 학교 동문 결속력이 점점 떨어지고 있고, 동문회 등이 운영되지 않는 학교도 늘고 있죠. 그래서 청주고등학교의 100년이라는 역사와 전통이 더욱 중요하고 무겁게 다가옵니다. 한번 끊기면 다시 이어나가는 것이 훨씬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후배들이 느끼는 부담감도 적지 않더군요.”
그동안의 史
100년사는 앞서 발간된 60년사를 기반으로 작업하고 있다. 동문회에서는 그동안 『청주고등학교 50년사』와 『청주고등학교 60년사』, 『청주고등학교 80년 약사(略史)』를 냈다.
“60년사를 보면 50년사도 발간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있는 대로 60년사를 참고하고 있었는데 청주기록원에 오니 이 책이 여기 있네요!”
청주기록원에 기증으로 들어온 『청주고등학교 50년사』를 본 그의 얼굴에 웃음이 돌았다.
『청주고등학교 60년사』를 보면 개교 이후부터 학교의 교육과정 변화를 다 볼 수 있다. 크게 청주고보, 제일중학교, 청주중학교, 청주고등학교 순으로 역사를 서술하고 있고, 마지막은 동문회 명단이 두껍게 구성되어 있는데 모두 600쪽에 달한다. 청주고보 선배들이 체육으로 일본 학생들을 이긴 이야기, 일본의 강제동원, 한국전쟁 당시 일기장, 1960년대 원탑 교사 신축 후 양계장 이전을 촉구하는 일명 닭똥 데모 사건, 지금은 80대가 된 졸업생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등 재미있는 내용 역시 많이 담겨있다.
“이기붕 전 부통령 아들의 서울법대 부정편입 반대를 남재희, 김종호 동문이 주도한 역사를 알게 된 것도 흥미롭고, 1965년 교내에 구내이발소가 있었던 것, 이백하 선생님 재직 10주년 기념 사은사 등 과거 선배들의 문체를 그대로 볼 수 있었던 것도 큰 복이라 생각합니다.”
내용을 따라 당시의 상황을 그려보면 어려운 시기에 힘들게 공부한 선배들을 떠올리게 된다는 그는 지금은 만나지 못하지만 남아있는 기록을 통해 과거와 충분히 교감하고 있는 중이다.
청주고 50년사 ‘동문 회상기’ 中
윤종선(23회 동문회 부회장)
“1학년때 일제로부터의 해방의 감격을 누렸으나 곧 미소 양대국의 분할점령하에 놓인 분단된 신생국으로서 필연적으로 걸어야만 했던 혼란과 대립을 경험했으며, 급기야는 6학년 때 6.25 동란이 발발, 민족상잔이라는 쓰라린 고초를 겪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나의 학창시절의 시대적 배경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혼란과 불안정, 대립과 상극의 소용돌이였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물결 속에서 성장하고 있었던 학생들의 기풍은 물론 당시의 시대상을 그대로 흡수, 반영하고 있었으므로 특수한 예외가 있었겠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은 안정을 찾지 못한 채 혼란 속을 방황하고 있었다고 특징 지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중화(28회 청주이중화외과원장)
“모범생인 ‘타(他)가 공인(公認)’하는 내가 몰래 극장에 들어가 구경하는데 단속 나온 선생님이 옆자리에 어느 틈에 앉아있지 않은가? 나란히 앉아 다 구경하고 돌아간 이튿날 훈육실에 불려갔다. 최소한도 ‘1주일 정학’을 각오한 나에게 어제의 영화감상을 물으셨다. 나는 그 후 다시는 몰래 영화 구경을 하지 않았다.”
권용식(10회 재경동문회 부회장)
“5학년 때 동맹휴학을 하다가 학우 몇 사람만을 희생시켰던 일. 그 당시 담임 성기호 선생님의 눈물 어린 회유는 잊을 수가 없고 그 교도는 어린 가슴에 한국인임을 깨닫게 하여주었음. 나는 강건한 체질도 아닌데 끈기로써 5개년 개근을 해낸 것은 쾌거일 수 있음.”
이덕호(29회 제천동문회 부회장)
“교칙상 머리를 못 기르게 하는 것을 졸업을 앞두고 조동진 담임(擔任) 선생님께서 가위 들고 머리를 깎으시던 일. 고3시 맥고모에 소매 긴 Y샤쓰를 입고 등교했더니 교직원 조회가 끝나자 색출하려 할 때 급우들이 맥고모를 감추어 주고 교복을 빌려와 가까스로 넘긴 일.”
한현구(31회 동문회 감사)
“당시의 학교 생활 중 인상 깊었던 일 중에 체육대회 시 타교 응원단의 밴드부가 몹시 부러워 졸업기념으로 밴드 일조를 모교에 기증키로 하여 전교생이 공병수집을 하던 기억이 인상적이다.”
학창시절의 기억 그리고 기록
학교의 역사를 기록하는 그는 어떤 학생이었는지 궁금해졌다.
“제가 기억하는 저는 평범한 학생이었습니다. 교복을 입고 입학을 했는데 그때 교복 자율화가 시범적으로 운영이 되어서 중간중간 사복도 입었죠. 근데 옷이 없어서 뭘 입어야 하나 고민도 했었는데…
그리고 학교 야구부가 전성기였던 시절이라 응원하러 청주체육관에 가기도 했고 난생처음 서울도 가서 응원하고 왔습니다. 또 ‘원탑’ 문학회 활동을 했어요. 중앙공원에 있었던 시민회관에서 시화전을 하고, 끝나는 날 합평회라는 걸 하는데 제가 「죄인」이라는 제목의 시를 전시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청주여자고등학교에 다니는 선배가 굉장히 어려운 질문을 하더군요. 그때, 시는 함부로 쓰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며 문학회에서 탈퇴를 했습니다. 그 후 졸업하고도 한참 뒤에 제가 쓴 시가 교지에 실린 걸 봤습니다. 조금 창피하지만 기분이 좋더군요.”
그가 학창 시절을 잘 기억하는 것도 어쩌면 그의 기록에서 시작된 것 같다. 그는 초등학생 때부터 글쓰기에 두각을 나타냈다. 방학 숙제로 매일 일기를 쓰는 것이 지겨웠던 그는 개학 무렵에야 일기를 몰아서 쓰곤 했는데 그 일기로 상을 받을 정도였다. 어쩌면 글과 기록은 그에게 필연 같은 것이었는지 모른다.
동맹휴학
1927년도와 1930년도에는 동맹휴학이 있었다. 학생들이 교육 또는 정치적 요구를 하며 펼친 단체 학생운동이었다.
“1927년 청주고등보통학교에서는 일본인 교장의 조선인 모욕 비하 훈시와 역사 담당 교사의 조선비하 잡지 기고문에 항의하여 등교를 거부하는 동맹휴학 사건이 있었어요. 이 일로 99명의 학생이 징계처분을 받고 퇴학자 중 3명은 끝내 복학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1930년 1월 20일에는 청주고보 학생들이 청주장터에서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지지하는 행진시위를 했고요.”
이 행진 시위 때 영동 철도 건널목 근처에서 일본 경찰 기마대와 격투를 벌이며 준비한 격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백의혼 싸고도는 흑운을 격파하고
광명한 자유로운 길을 밟자.
굳세게 싸워라 용감히 저항하자.
조선민족은 자각하여 우리 2천만 동포의 자유를 찾자. 만세, 만세.”
이로 인해 퇴학 6명, 근신 1년 9명, 근민 8개월 12명, 서약서 169명이 처벌을 받았다. 『청주고 60년사』와 『청주의 사회변천사』 (청주문화원, 2017년)에 기록된 내용을 토대로 정지성 동문(50회)이 중심이 되어 국가보훈부에 당시 퇴학자 7명에 대해 독립유공자 선정을 신청하고, 학교 측과 협의하여 명예졸업장 수여 등을 준비하고 있다.
“이분들을 독립유공자로 등록하기 위한 기록을 찾는 그 과정이 매우 어렵지만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하니 이 어려움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에 활동하느라 제때 학업을 잇지 못한 분들이 이제야 그 시간을 인정받게 되는 것 같아 참 좋습니다.”
100년사를 만드는 과정에서 뜻깊은 일까지 하게 된다.
함께 만드는 학교사
청주고등학교 정문 앞에 한동안 동문들의 기록을 수집한다는 플래카드가 걸려있었다. 청주기록원 역시 기록물 기증과 수집 업무는 늘 현재 진행중이고 또 쉽지 않은 일임을 알기에 청주고등학교 동문회는 기증이 얼마나 이뤄지는지 궁금했다.
“100년사 편찬을 위해 국립중앙도서관이나 국회도서관 쪽에서 자료를 찾고 있기도 하지만 실질적인 것들은 동문들이 소장하고 있어요. 20회까지의 선배님들은 거의 돌아가셔서 이제는 그 후손들에게 자료를 받고 있습니다.“
기증은 생각보다 잘 들어오지 않는다고 한다.
”현재까지는 열 분 정도가 본인이 소장하고 있는 자료 또는 예술품 기증 의사를 밝혔어요. 그 중에서도 48회 이종대 선배님은 청주고등학교 문학동아리인 ‘원탑’의 문학지를 기증해주셨습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기다리기만 할 수는 없는 일. 현재 퇴직하거나 은퇴했어도 지역사회나 모교 발전에 기여한 동문을 비롯해 여러 가지 활동을 쭉 정리해서 인원수 제한 없이 100여 명의 동기사(史)를 수집하고 있기도 하다.
“이렇게 하면 그 시절 교육 상황이나 졸업 후 사회활동을 알 수 있죠. 사진이나 수집된 교지, 문학회 등 하나하나의 기록이 모여 맥락이 있는 새로운 기록물이 될 겁니다. 각 가정에 가지고 있는 기록이 많을 거라 생각해요. 잘 내어주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에 우리가 찾아나서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청주고등학교 100년사는 화보집과 함께 한 질로 만들 계획이다. 조금 더 여유가 되면 앨범을 데이터베이스화 하는 작업까지 크게 세 가지를 준비하고 있는 셈이다. 60년과 100년 사이의 40년이라는 간극을 메우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그의 고민은 오늘도 깊어지고 있다.
함께 만드는 학교사
청주고등학교 정문 앞에 한동안 동문들의 기록을 수집한다는 플래카드가 걸려있었다. 청주기록원 역시 기록물 기증과 수집 업무는 늘 현재 진행중이고 또 쉽지 않은 일임을 알기에 청주고등학교 동문회는 기증이 얼마나 이뤄지는지 궁금했다.
“100년사 편찬을 위해 국립중앙도서관이나 국회도서관 쪽에서 자료를 찾고 있기도 하지만 실질적인 것들은 동문들이 소장하고 있어요. 20회까지의 선배님들은 거의 돌아가셔서 이제는 그 후손들에게 자료를 받고 있습니다.“
기증은 생각보다 잘 들어오지 않는다고 한다.
”현재까지는 열 분 정도가 본인이 소장하고 있는 자료 또는 예술품 기증 의사를 밝혔어요. 그 중에서도 48회 이종대 선배님은 청주고등학교 문학동아리인 ‘원탑’의 문학지를 기증해주셨습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기다리기만 할 수는 없는 일. 현재 퇴직하거나 은퇴했어도 지역사회나 모교 발전에 기여한 동문을 비롯해 여러 가지 활동을 쭉 정리해서 인원수 제한 없이 100여 명의 동기사(史)를 수집하고 있기도 하다.
“이렇게 하면 그 시절 교육 상황이나 졸업 후 사회활동을 알 수 있죠. 사진이나 수집된 교지, 문학회 등 하나하나의 기록이 모여 맥락이 있는 새로운 기록물이 될 겁니다. 각 가정에 가지고 있는 기록이 많을 거라 생각해요. 잘 내어주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에 우리가 찾아나서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청주고등학교 100년사는 화보집과 함께 한 질로 만들 계획이다. 조금 더 여유가 되면 앨범을 데이터베이스화 하는 작업까지 크게 세 가지를 준비하고 있는 셈이다. 60년과 100년 사이의 40년이라는 간극을 메우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그의 고민은 오늘도 깊어지고 있다.
어느 기증자의
시절
지난해 우리나라 곳곳에서 <어느 수집가의 초대>라는 전시가 열렸다. 21,693점의 미술품과 문화재 등을 기증받아 진행된 이 전시는 많은 사람의 관심 속에 진행됐고, 관람객들에게 색다른 경험을 선사했다.
수집은 애정에서 시작된다. 엽서, 우표, 화폐, 책 등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나둘 모으며 그 자체에 대한 추억을 비롯해 수집하는 과정에서의 에피소드까지 다양한 기억을 품고 있다.
청주기록원에 500여 점의 수집품을 기증한 손광섭 님(청주고등학교 35회 졸업생)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기증한 기록물에는 청주고등학교 졸업앨범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기증서를 작성하며 “이제 저에게 더는 필요치 않아서 기증하려고 해요.” 라고 했지만 긴 세월 간직해온 기록물이 어떻게 소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오랜 시간 소중히 모아온 무언가를 모든 사람이 공유할 수 있도록 내어주는 것은 어떤 마음이었을지, 청주기록원은 <어느 기증자의 시절>이라는 타이틀로 청주고등학교를 또 다른 기록으로 남겨본다.
내가 기억하는 학교
졸업앨범 표지를 넘기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학교 전경이다. ‘원탑’이라고 불렸던 청주고등학교 건물은 다소 특이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 동그랗게 생긴 건물이 학교라니. 복도도 벽을 따라 원형의 형태였을까, 교실은 곡선을 어떻게 따라갔을까 하는 상상을 하게 된다. 그에게 학교에 관해 물었다.
“이 주변은 허허벌판이었어요. 아무것도 없었죠. 그 당시에 버스도 없고요. 학교 건물은 도넛처럼 가운데가 뻥 뚫려있는 모습이고, 계단이 나선형이었죠. 책상이 원의 중심부를 보는 모습으로 배치되었어요.”
지금은 볼 수 없는 당시의 교사(校舍)를 졸업앨범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 새삼 새롭다.
원형 교사가 지어진 것이 1960년이었으니 청주고등학교 14년의 역사를 함께했다. 아쉽게도 이 보기 드문 원형의 건물은 허물어지고 없다.
건설회사를 운영했던 그는 지금의 교사 건축 공사를 맡아서 진행했었다. 모교의 새 교사를 지었다는 자부심이 있지만 공사 당시를 떠올리면 힘든 기억이 크다.
“준공까지의 과정이 참 험난했어요. 당시 공사 감독관과 많이 부딪혔는데, 교사를 사직대로에 가깝게 배치하겠다는 걸 결사적으로 반대했죠. 교실 바로 옆이 도로면 그 소음을 감당하기 어려우니까요. 뿐만 아니라 말뚝의 수, 벽돌의 배치 등 신경 쓸 것이 많았죠.”
그는 졸업앨범을 보면서 과거의 순간들을 기억해 나갔다. 사진 찍으러 다니기 바빴던 기억, 먹고 살기 어려웠던 기억, 치열하게 일했던 기억 등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내며 기꺼이 청주기록원에 흔적을 남겼다. 그가 이렇게 많은 기증을 한 데에는 혼자 가지고 있는 것보다 많은 사람과 함께 보는 것이 더 가치 있는 일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이러한 흔적은 청주가 되고, 우리는 모두 청주의 역사가 된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청주기록원 홈페이지에서 확인해주세요.
평범하고도 특별한 기록자
기록하는 사람은 전문가, 기록의 대상은 특별한 무언가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현재 남아있는 숱한 기록이 과거의 대단한 사람, 유명한 사건 등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청주기록원에 방문하면 기록에 관한 관점을 바꿀 수 있다.
기록에 대한 갈증을 해소할 수 있도록 기획된 시민기록강좌가 그것이다. 이 강좌의 강사는 기록하는 사람들이, 수강생은 기록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였다.
그리고 그 강좌에서 만난 특별한 기록자 변정순 씨와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누어보았다.
사람을 품은 도시
우연의 우연은 운명
변정순 씨(45, 청주시 금천동)는 건강이 나빠져 휴직을 했다. 몸이 상할 만큼 과로했던 나날들이 허무하게 느껴지던 차에 몸과 마음을 추스를 필요를 절실히 느꼈다. 불면증으로 밤을 꼬박 새운 어느 날, 동이 틀 무렵 집을 나섰다. 그리고 달리기를 시작했다. 습관을 들이는 방법으로 자신의 기록을 남에게 보여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무도 보지는 않지만 달리고, 사진 찍고, 업로드. 매일매일 올리니 어느덧 261일 차.
이 작은 일이 그에게 새로운 활력을 가져다 주었다. 쉬는 동안 하고 싶은 게 뭐였는지 생각할 수 있었다. 도서관 가서 책 읽기, 강좌도 하나씩 들어보고, 시민신문도 보던 와중에 시민기록강좌를 발견했다.
헝클어진 생각을 정리하고 싶은 바람도 있었고, 나만을 위한 시간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을 고민하고 있었기에 시민기록강좌를 꼭 들어야 할 것 같았다. 어떻게 일상과 주변을 기록할 수 있을지 답을 줄 것 같은 커리큘럼을 보고 그는 바로 신청을 했다
마음속에 품고 있던 것들
옥산면 소로리 마을을 기록한 김애중 시민기록활동가, 차근차근 기록하는 단계를 알려주는 유영선 칼럼니스트, 동네의 기록을 관광 콘텐츠화한 이옥수 대표 등의 이야기에 그는 기록의 새로운 관점을 키우게 되었다. 시민기록강좌를 통해 청주를 꾸준히 기록해 온 이야기와 그 노하우에 대해 배우고 싶었던 그는 어린시절을 문득 떠올렸다.
“봄이면 꽃놀이, 가을이면 단풍놀이, 모든 걸 마을 사람들과 함께 했어요. 물론 어른들이 시켜서 했던 거지만 아이들이 발표회도 하고, 대형 솥으로 음식도 함께 해 먹고, 재밌고 좋은 기억들이 많아요. 그런데 지금은 동네에 대한 작은 사진 한 장조차도 찾을 수 없더라고요. 이런 잃어버린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잘 알아요.”
어느덧 청주살이 10년 차가 되면서 이제는 청주의 기억이 많이 쌓였다. 청주 토박이인 남편을 따라 백로식당, 코끼리 분식, 공원당 등 오래된 가게들도 다니고, 지역행사에도 많이 참여했다. 자전거로 이곳 저곳을 다녀보니 청주의 역사나 더 가볼만한 곳에 궁금증이 생기기도 하고, 반대로 혼자 알기 아까운 장소나 정보가 생기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지역 콘텐츠로 문화와 상품을 만드는 로컬 크리에이터 활동에도 관심이 생겼다.
“좋은데 아무도 모르면 안타깝잖아요. 소소하더라도 관심 있는 것, 관련 있는 것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요. 그리고 앞으로 하는 일에 강좌에서 접한 사례를 접목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완강자의 의지
12회의 수업이 적은 횟수는 아니다. 대학교로 치면 한 학기의 강의를 들은 셈이고, 일주일에 최소 4시간씩 청주기록원에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변정순 씨는 40분씩 자전거를 타고 기록원을 오갔다. 그에게 시민기록강좌 완강한 소감을 물었다.
“가려운 데를 긁어주었던 것 같아요. 강좌를 들으면서 청주기록원 기록도 찬찬히 들여다보고 기록이 갖는 의미를 천천히 느껴보려고 했습니다. 개인적 삶과 공동체에 대한 애정, 꾸준히 전개해 온 의미 있고 다양한 활동을 생활화해온 동료 수강생 열의에도 감탄이 나왔어요. 졸고 싶어도 옆자리에 앉은 수강생 눈빛이 눈빛이 반짝거리는 것을 보면 못 졸아요.(웃음) 시민기록가들이 일상을 기록하고 공유한다면 대단한 자산이 되겠다 싶었습니다. 하루 중 기록하고 싶은 순간을 의식하게 되었고, 조금 더 일상을 깊이 있게 음미할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12회의 수업을 모두 들은 사람들을 ‘완강자’라고 불렀는데 자꾸만 완강자(完講者)가 아닌 완강좌(完講座)라고 부르게 된다. 완강자의 의지는 시민기록강좌 교재 첫 페이지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가 가장 기억에 남는 거라고도 했다. 모양이 다른 꽃 스티커가 붙은 출석 체크 페이지가 그것이다. 어른이 되어서도 칭찬이 고프다. 무기력한 사람들에겐 이런 작은 것이 삶의 의욕이 되기도 한다.
버킷리스트 하나
‘기록하지 않으면 기억하지 못한다.’
시민기록강좌에서 받은 가장 강렬한 메시지였다. 그래서 그는 버킷리스트를 작성했고, 그중 하나를 실현하기 위해 엄마와 함께 치앙마이로 떠났다.
“태국말로 ‘sabai sabai’가 ‘느긋느긋하게’를 뜻한다고 하는데 평생 빨리빨리 살아온 우리 모녀에게 느긋하고 편안한 여행이 되길 바라며 33일간 매일 여행기를 남겨보았어요. 저는 사진과 짧은 코멘트를 남기고 저희 어머니는 그림일기를 쓰셨는데 어머니 인생 75년 만에 새로운 재능을 발견한 놀라운 시간이었습니다.”
시민기록강좌를 들으면서 엄마에게도 계속해서 기록해보라고 채근했던 터였다. 이 여행을 하면서 엄마를 더 이해할 수 있게 되기도 했다.
버킷리스트 둘
모햐툰(www.instagram.com/mohya_toon)이 탄생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만화책을 끼고 살았고, 웹툰도 초창기 때부터 쭉 관심있게 봤다. 그러다 상대적으로 게시가 자유롭고 또 개인적인 이야기도 환영받는 인스타툰을 마음 속에 늘 그리면서 언젠가 도전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진짜 시작했다. 달리기를 하며 생긴 용기가 도움이 됐다.
‘모햐’라는 캐릭터는 청주 토박이 남편의 부지런한 모습과 정겨운 말투로 만들어졌다.
”오늘 모~햐?“
”아니이~ 청주를 설마 모르능겨?
하고 눙치는 청설모 캐릭터인 ‘모햐’를 만들었다. 청주 곳곳을 방문하며 찍은 사진에 곁들여 올리고, 100일간 인스타툰에도 도전해봤다. 매일 올리는 것과 생각의 일부를 이미지화한다는 점이 어려웠지만 꾸준히 하면서 성취감도 얻고, 댓글을 달아주는 사람들과 소통하는 재미도 느꼈다. 즐거운 청주살이에 모햐도 함께하고 있는 셈이다.
작심삼분 인간
‘완벽한 그 언젠가는 오지 않는다.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다.’
그는 주저하거나 쭈뼛댈 때 스스로 말하며 그 순간에 핸드폰을 열어 메모장에 한 줄이라도 적어보려고 한다. 작심삼일도 아니고 작심삼분도 힘겨웠던 그는 우물쭈물하던 순간에 무심코 적은 한 줄에서 시작한 기록의 힘을 실감하고 있다.
“기록으로 기억되는 하루들이 계단처럼 쌓여 또 다른 세상의 문을 발견하거나 새로운 인연을 만나게 해줄지 모르니까요.” 라고 멋지게 말하는 그도 알고보면 자기 검열이 심한 사람이다. 잘해야 한다는 생각에 선뜻 시작이 어려운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일기장이나 메모지에 늘 맨 앞 한두 장만 쓰여있곤 하는 사람들.
시작이 어렵더라도, 중간에 포기를 하더라도 일단 시도했다는 것에 격려를, 끝까지 해냈다면 칭찬을 스스로에게 보낼 수 있는 다정한 우리가 되면 어떨까. 그와의 대화는 어쩐지 온기가 어렸다.
치유의 힘, 기록
평소 같았으면 그냥 흘러갔을 1년이 차곡차곡 쌓였다. 몸을 움직이니 버킷리스트도 하나씩 해나갈 수 있었고, 성취감도 커졌다. 그는 기록을 남기면서 시작된 많은 일들을 생각하며 스스로도 놀라워했다. 이전보다 더욱 건강해졌고 새롭고 즐거운 일들이 많이 생겼다. 버티기 힘들 것 같던 시간들을 잘 이겨냈다.
“과거를 떠올리면 아프기만 한 사람들이 있잖아요. 저희 엄마도 그래서 옛날 이야기를 잘 안했어요. 이번에 함께 여행하면서 옆구리 쿡쿡 찔러가며 엄마의 이야기를 끄집어내려고 노력했는데 기분이 좋으시니 이야기를 곧잘 하시더라고요. 엄마에게 기록을 권하고 그 남겨진 기록을 함께 공유하고, 이런 연결고리들이 생긴 게 저에게는 큰 선물이에요.”
청주기록원에 가족의 릴레이 기록이 남았으면 좋겠다고 하는 그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많은 이야기에 관심을 가졌다.
“성실히 하루하루를 살다가 어느 날 어떤 시절을 떠올리고 싶을 때 기록원에 가서 가족의 기록을 보며 힘을 얻고 싶어요. 저는 힘들 때 좋았던 기억을 꺼내는 게 큰 힘이 되거든요. 그러니 그런 기억들이 날아가지 않게 기록으로 꽉 잡아주고 싶어요. 일흔이 넘은 엄마에게 이것저것 권한 것도 같은 맥락이기도 해요. 릴레이 기록문화가 활성화돼서 차고 넘치는 이야기들이 모이면 그게 또 청주를 떠올리는 강력한 기억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청주만의 문화
그는 기록을 남기고 콘텐츠를 만드는 활동을 하며 느낀 게 있다.
“콘텐츠랩이나 충북과학기술혁신원에서 웹툰과 이모티콘 강좌를 듣고 직접 해보기도 하고, 모햐툰을 그리면서 떠오른 캐릭터를 정리해 저작권 등록도 7개나 했어요. 이 과정에서 열정 넘치는 청년 활동가들을 많이 만나기도 했고요. 아이들에게 성공은 학교 졸업하고 청주를 떠나야 성공하는 거래요. 지역 인재들을 잘 키워놓고 다 떠나보내면 너무 안타깝잖아요. 조금 더 알아보고 또 눈을 돌리면 이렇게 도와줄 사람들과 자원이 많이 있다는 걸 사람들이 많이 알고 또 활용했으면 좋겠어요.”
그는 <남주동化>라는 프로그램에서 <마이 치앙마이 다이어리>라는 제목으로 동화책을 만들기도 했다. 그와 엄마의 치앙마이 여행 기록으로 동화책을 직접 구성하고, 그에 어울리는 향수도 만들었다. 기록이 다양한 콘텐츠로 확장되는 경험을 했다.
청주는 기록문화 창의도시, 재미있는 청주, 꿀잼 도시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계속 하고 있는데 그중 기록을 일상적인 궤도로 올리려는 시도는 고무적이었다. 기록 아카이브가 좀 더 대중적이게 되면서 기록 콘텐츠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도도 높아졌다. 이에 따라 청주기록원이 느끼는 책임감도 커졌다.
시민기록강좌 역시 기록문화에 대한 진입장벽을 낮추는 동시에 기록에 대한 갈증을 해소시켜주기 위해 만들어졌다. 강좌가 끝나고 취합된 설문조사에서 프로그램 자체에 대한 만족도는 높았지만 수강생이 제일 많이 원했던 의견은 실습까지 연계됐으면 하는 것이었다. 듣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직접 해보고, 그 방법론을 몸소 체득할 수 있는 기회를 필요로 했다. 그는 청소년들을 대상으로도 이런 수업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아이들이 직접 블로그를 개설해서 꾸준히 글을 쓰게 하는 것도 교육 효과가 크다고 해요. 어렸을 때부터 다양한 걸 접하게 해주는 게 좋은 것 같아요.”
시민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기록문화를 위해 청주기록원이 더 깊은 고민을 해야 할 때이다.
청주시 시민기록강좌
2022년 시민 역사 기록학교를 운영한 것에 이어 조금 더 시민기록에 초점을 맞춰 기획한 프로그램. 각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전문가를 강사로 초청해 여러 가지 기록 이야기를 들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삶의 하이라이트
특집 2
청주기록원이 청주 시민을 대상으로 진행한 프로그램은 매우 다채롭다. 그중 교육 관련 분야를 살펴보면 어린이와 청소년부터 전 시민까지 모두에게 열린 교육을 지향하고 있다.
어린이에게는 기록의 중요성과 즐거움을 알려주고, 청소년에게는 직업과 연계하여 새로운 직무를 공유하였다.
일반 성인에게는 지역, 역사, 시민 등 다양한 테마를 중심으로 기록 관련 교육을 진행하였는데, 11월부터 진행한 <나의 하이라이트>는 그동안의 교육과는 다르게 결과물 창출에 방점을 두고 진행되었다. 그 결과물 창출은 까다롭거나 어려운 것이 아니라 기록을 체득하는 것에 중점을 뒀다.
시골집에 가서 낡은 앨범을 뒤져 흑백사진을 꺼내오기도 하였고, 침대 아래의 먼지 쌓인 박스에서 어릴 적 주고 받은 편지를 찾아내기도 하였다. 아이의 초음파 사진을 오랜만에 꺼내보았고, 스마트폰 속의 수많은 사진 중 어떤 사진 속의 미소가 더 예쁜지 한참을 들여다보기도 하였다.
그리고 온 마음을 다하여 기록하기 시작했다. 나의 어린 시절에 관하여 기록하였고, 뒤늦은 육아일기를 쓰기 시작하였다.
그 과정에서 1,000장이 넘는 사진과 기록물을 스캔하였고, 300여 장에 달하는 사진을 새로 인화하였다.
기록물을 기반으로 새로운 기록물인 『어린 시절: 전지적 어린이 시점』과 『육아일기: 너의 첫사랑은 나였어』를 출판하였다.
참여자들의 다양한 기록을 함께 들춰보자.
인생의 무지개를 만나다
칠순이 넘어서 기록을 시작한 ‘무지개’ 작가. 그 시작은 딸이 태국의 북부도시 치앙마이로 한 달 살기를 떠나자고 한 다음이었다. 매일 일기를 써서 일상을 기록하면 어떻겠느냐는 딸의 제안에 시작한 그림 일기. 그 일기를 시작으로 청주기록원의 <나의 하이라이트>에 참여하는 용기를 냈는데 삶을 톺아보는 시간이 되었다.
결혼도 일찍 했다. 열아홉 살 겨울에 살림을 시작했나 보다. 약혼식만 하고 몇 년 살다 결혼식하고 애기가 없어서 8년 만에 딸을 출산했다. 그때 기쁨이란 무엇으로도 표현이 안 된다. 둘째도 딸, 셋째는 아들. 2녀 1남 학교 가니 둘 다 공부도 잘 한다. 첫째 딸은 건국대, 둘째 딸 고려대, 정말 꿈만 같지요. 일을 해도 힘든 줄도 모르지요. 애들 공부할 때는 장사도 잘 돼서 돈 걱정 안 했지요. 내가 공부에 한이 있어서 쟤네들이 하려고만 하면 얼마든지 해주지요. 내가 쉰두 살이 되니 남편이 세상을 떠났네요.
참여 작가: 무지개
어린 시절 슬픈 기억은 애써 잊고 젊은 시절 고생한 기억을 꼭꼭 누르며 하루하루를 열심히도 살았지요. 이제 뒤돌아보니 비 그친 뒤 무지개 같은 시간 속에 있네요.
처음의 기록들
모두에게, 그리고 모든 순간에 처음이 있다. 시간이 흐르고 반복될수록 우리는 그 처음이 주는 설렘이나 떨림을 잊게 된다.
‘황서현’ 작가는 어린 시절을 속의 처음을 기록하기로 하였다. 잘 생각이 나지 않는 것도 있고, 헷갈렸다. 왜 더 일찍 기록하지 못하였을까 아쉬움이 남을 때면 미래의 어느 날에는 오늘 남긴 이 기록 덕분에 다시 이런 후회가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차분히 기록하였다. 서툴지만 떨리고, 그래서 아름다웠던 처음에 관하여.
다섯 살쯤 살던 집 앞 골목. 당시는 주택에 살고 있어서 마당, 집 앞 골목을 넘나들며 뛰어놀았던 곳. 자전거를 타고 집을 돌아나가면 동네 놀이터까지 연결되어 당시의 내가 많은 시간을 보냈던 곳으로 기억된다. 지금도 남아 있을지 궁금하다.
태어난 후, 첫 여름에 놀러간 외갓집에서 찍은 사진. 집에도 없는 귀한 사진을 사촌오빠가 삼촌댁 정리하면서 보내주었다. 사진을 받자마자 가족 모두를 추억 여행에 빠지게 만들었다.
참여 작가: 황서현
문득문득 떠오르는 어린 시절의 기억이 소중하고 중요하게 생각되기 시작했다. 지난날의 추억을 간직하고 앞으로 다가올 나의 날들을 더욱 아끼며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주말의 청주를 담다
아이들에게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은 것은 모든 양육자가 같은 마음일 것이다. ‘김보람’ 작가는 아이들에게 청주에서의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리고 아이들이 스스로도 추억을 만들어가길 바랐다. 그것은 먼 훗날, 힘들거나 지치는 날이 오면 기댈 수 있는 기억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들과 주말이면 청주 곳곳을 다녔다. 신문, 뉴스, 온라인 카페, 소식 구독 서비스 등을 통해 정보를 모았고 정리하였다. 그 덕분에 아이들은 매주 다른 곳에서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차곡차곡 모은 기록과 사진은 아이들에게는 행복한 기억으로, 청주에는 그 시절의 이벤트로 남을 것이다.
참여 작가: 김보람
우리 가족은 주말에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없는 환경이라 아이들과 함께 하지 못한 시간이 많았고, 작년 12월부터 시작된 육아휴직이란 소중한 시간을 얻음으로 즐길거리를 찾아 주말마다 집을 나선다.
외출할 때는 네이버 길찾기를 통해 타야 할 시내버스 번호와 승하차 정보를 얻고 아이들과 청주 곳곳의 전시관, 공연장, 축제 등 즐길 거리를 찾아다니는 중이다. 더불어, 청주에 산지 16년 만에 청주를 새로 알아가고 있는 중이기도 하다. 주말마다 집을 나서니 첫째는 항상 “이번 주말엔 어디가?”를 묻는다. 내가 복직한 후에도 여행 등으로 즐거운 주말을 보낼 수 있기를 바란다.
아이는 엄마의 우주가 된다
아이가 세상에 온 순간, 아이에게 전부는 엄마이고 엄마의 전부는 아이가 된다.
작은 하품, 느린 움직임, 섬세한 눈맞춤…. 모두가 선물이 된다. 엄마는 아이를 만나며 새로운 우주를 만나게 된다. ‘우주어멈’ 작가는 그 가슴 뛰는 이야기를 뭉클한 시선으로 담아냈다.
참여 작가: 우주어멈
우주를 낳아놓고 우주를 이해 못하는 엄마.
한푼이고 싶은데 반푼이인 엄마.
그래도 엄마.
청주기록원의 <잇다, 청주>는
청주기록원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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